토종 농사는 새삼스럽다. 모두가 개량종을 심는 시대에, 토종을 키워 파는 농민은 새삼스럽다 못해 새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토종 농사는 새로운 게 아니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씨앗을 찾아내 새롭게 심는 것일 뿐. 그리하여 우리가 잃어버렸던‘그 맛’을 되찾는 일이다. 글 이미선 사진 남윤중
대한민국 1호 토종마을
토종은 경쟁력이 없을까. 개량종보다 수량성이 떨어지고 모양도 뒤지니, 농민에겐 비효율적이고 소비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할까. 그 질문에 ‘아니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농민들이 있다. 농민이 아니라 ‘농민들’이다. 경기 화성시 서신면 궁평2리는 마을 단위에서 토종 농사를 지어 화성푸드통합지원센터(이하 화성푸드센터)에 날마다 납품하고 있다. 화성푸드센터에선 궁평2리마을이 출하한 토종농산물을 화성 로컬푸드 직매장에 토종 전용 판매대를 설치해 진열하고, 학교급식용으로도 보낸다. 이쯤 되면 ‘토종은 경쟁력이 없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에 균열이 생길 만하지 않은가.
[김명민 씨가 쏘아올린 작은 공]
궁평2리마을의 토종 농사는 마을 주민 한 명의 옛 맛 찾기에서 시작됐다.
2010년 이 마을로 귀농한 김명민 씨(63)는 농사를 지으면서 ‘어릴 적 엄마가 해주던 음식 맛’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갔다. 텃밭에서 키운 푸성귀로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을해봤지만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엄마가 해주? 그 맛이나지 않았다. 기후가 변해서 그런가? 토질이 변했나? 궁금하던 차에 토종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생겼다. 로컬푸드직매장에 다니면서부터다.농사가 손에 익어가면서 김씨는 화성시에 있는 로컬푸드직매장에 종종 들렀는데, 매장에 가면 다른 농가들은 뭘어떻게 포장해서 냈는지 유심히 살펴보곤 했다.“그곳에서 이따금 토종 농산물을 보곤 점차 관심이 생겼어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엄마의 음식 맛이 토종과 관련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거죠.”그길로 김씨는 온 집 안을 뒤지고, 형제들에게도 확인한끝에 부모님이 남겨주신 오이 씨를 찾아냈다. 김씨는 바로 모종을 냈고, 언제 받았는지도 모를 그 씨는 용케도 발아가 돼 오이가 주렁주렁 달렸다. 오이를 따 오이소박이를담가 맛을 본 김씨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릴 적 엄마가 해준 그 맛이었던 것이다.
[병해충이 와도 스스로 이겨내는 자생력]
그 일을 계기로 김씨는 집 안팎에서 토종을 찾기 시작했다. 김씨네 밭에선 토종 파도 자라고 있었다. 해마다 습관처럼 씨를 받아 심던 파가 알고 보니 토종 조선파였다. 내처 동네 사람들의 텃밭도 조사했다.
“궁평2리마을엔 50여 농가가 있는데, 희한하게도 집집마다 토종 한두 가지씩은 있더라”는 김씨는 “그분들 역시 출하용 농사와는 별개로, 토종이란 자각은 못한 채 맛이 좋으니까 가족들 먹을 요량으로 해마다 키우고 있었다”고 전한다.
김씨는 화성푸드센터에서 하는 토종 작물 재배교육에도참여했는데, 그곳에서 토종 씨앗 몇 가지를 얻을 수 있었다.그중 하나가 지금 로컬푸드 직매장에서 인기리에 팔리는 사과참외다.
김씨는 자신의 밭농사를 점차 토종으로 바꿔나갔다. 지금은 1만㎡(3000평) 밭이 온통 토종 작물로 채워져 있다. 배추·고추·파·미나리·참외·수박·오이·토마토 등 가짓수도많다. 이같이 토종에 매료된 이유에 대해 김씨는 “토종이맛도 좋지만 키우기도 쉽다”고 강조한다.김씨의 경험에 따르면 토종은 우리나라 환경에 잘 적응돼있다. 병해충이 와도 스스로 이겨내고 최근의 기후변화 속에서도 자생력이 매우 강하다. 올해의 경우 인근의 고추밭이 꽃 필 무렵 거센 바람으로 낙과해 흉작을 보이는 가운데 김씨네 토종 고추(안성재래)는 성인 키만큼 훌쩍 크고열매도 실하게 달렸다. 물론 농약은 “친환경 약제를 포함해 일절 치지 않았다”고 김씨는 말한다. 다른 품목도 비슷하다. 사과참외의 경우 진딧물이 껴도 그대로 두면 자라는속도가 늦어질 뿐 결국은 스스로 이겨낸다고 한다.
[1호 토종마을에서 1호 토종가공공장 만들기]
토종 전도사가 된 김씨의 토종 농사는 동네로 번져갔다.김씨는 먼저 심어본 뒤 키우기 쉽고 맛도 좋은 토종은 씨를 받아 이집 저집 나눠줬다. 2018년부턴 로컬푸드 직매장에 토종 농산물을 납품했는데, 판로를 확인한 주민들이 가족용이 아닌 상업용으로도 심기 시작해 지금은 마을 50여농가 중 14농가가 토종 농산물을 출하한다.출하 품목은 20여 가지에 달하며 그중 사과참외, 흑수박,조선오이, 조선파 등이 특히 인기다. 김씨에 따르면 사과참외는 과육은 물론 껍질까지 부드러워 껍질째 먹을 수 있고멜론 같은 향과 맛이 난다. 흑수박은 껍질이 두껍고 씨가많지만 사각사각 식감이 좋고 단맛의 여운이 오래간다. 조선파와 조선오이는 개량종과 비교해 맛이 월등한 데다 생명력이 매우 강해 해충 피해를 입은 파를 뽑지 않고 지상부만 잘라내면 곧 다시 자라난다고 한다.궁평2리가 토종 농산물의 주요 공급처가 되자 화성푸드센터도 이에 화답했다. 일반 농산물까지 합치면 무려 45농가가 내는 농산물을 실어 나르기 위해 궁평2리 마을회관 옆? ‘로컬푸드 거점 집하장’을 설치했다. 국내 최초의사례다. 그 덕분에 궁평2리마을은 더욱 화목해졌다.“전날 수확해 밤늦도록 포장한 농산물을 들고 새벽마다집하장에 간다”는 마을 주민 왕명자 씨(70)는 “동네 사람들을 날마다 집하장에서 만나다 보니 멀리 있는 가족보다더 편하고 친하게 느껴진다”고 흡족해했다.궁평2리마을은 이제 협동조합 결성을 준비하고 있다. 토종을 가공하기 위해서다. 농산물 가공·판매는 일정한 시설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현재로선 토종 고춧가루조차 만들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게 주민들의 계획?다.“우리는 누구보다 토종을 사랑하는 농부들”이라는 김명
씨는 “덕분에 국내 1호 토종마을이 됐고, 1호 거점 집하장이 생겼으며, 이젠 1호 토종가공공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포부를 밝혔다.
